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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과거1

과거 우리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밥 세끼는 먹었고, 고등학생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하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가르자면 중위권 소득과 차상위 계층의 중간이었으며, 차상위 계층쪽에 가까웠던 것 같다. 부모님의 재정적인 상황을 내가 모두 알수는 없으니 추측만 할 뿐이다.

 

나의 부모님은 두분 모두 국민학교도 나오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무척 옛날 분들도 아니시다. 내가 30대 중반인만큼 우리 부모님도 50-6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이며, 주변 친구들이 일반적으로 고졸, 못해도 중졸인 점을 감안하면 무척 힘든 삶을 시작하신 분들이다. 그럼에도 자식들을 위해 두 분 모두 열심히 일하셨기에 차상위 계층 이상의 수익을 얻으셨고, 이로 인해 국가로부터 생활과 관련된 혜택은 받지 못하셨다. 나는 지금도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 계층을 이해하기 어렵다. 신체적 정신적 문제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만, 남편과 아내가 모두 신체 멀쩡하다면 절대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 계층이 될 수 없다. 임금이 무척이나 저렴한 일을 하더라도 둘이 일을하면 이 계층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지 멀쩡한데 국가로부터 생활 관련된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나태하고 게으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우리 부모님은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시는 분들이셨다. 어쩔 수 없다. 배운 것도 물려받으신 것도 없는 나의 부모님들의 유일한 무기는 성실이셨다. 하지만 이 세상에 성실만 가지고는 인생이 바뀌는 순간을 얻기는 어렵다. 성실에 아이디어나 기술력, 혹은 자본이 더해져야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나의 부모님은 이 점을 너무 잘 알고 계셨기에 느리더라도 차분히, 안전하게 가는 것을 선호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전파하셨다. 버는 것보다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 가난한 사람들을 보라는 말. 나는 지금도 이런말을 좋아하지 않으며,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이 이런 생각을 가지신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교육 수준과 자본으로는 어떤 욕심도 내기 어려우셨을 것이다.

 

나는 그런 집안의 장남이었다. 내가 나의 방을 갖게 된 것은 군 전역 후 23세 때이다. 8살까지는 부엌이 밖에 있는 단칸방에 살았다. 10살까지는 화장실이 밖에 있는 단칸방에 살았다. 이후 방 두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갔지만, 부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으셔서 나의 방은 없었다. 가난은 그 자체로 재앙이다. 부유하지만 집안에 불화가 생기는 것은 '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다. 하지만 가난은 그 자체로 불화를 만들어낸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중학생이 된 시점부터 나를 실업계에 보내려고 하셨다. 대학 학비를 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셨기 때문이다. 학자금대출도 싫어하셨다. 앞서 이야기했듯 굉장히 보수적이신 분들이었기 때문에 자식이 빚을 지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데에 반감이 있으셨다. 나도 이 생각에는 동의한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면서까지 더 좋은 대학을 나올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4년제 대학 학위 이외에 그 이상의 것은 필요없었다. 지방국립대를 나왔지만, 설사 서울대를 나왔더라도 내 인생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추후 후술하겠지만, 굉장히 규모있는 글로벌 기업까지 다니면서 지방국립대는 나에게 어떤 방해도 되지 않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내가 학창시절을 보냈던 시기에는 실업계는 일종의 실패와 같은 느낌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빠른 취업을 위해 실업계를 가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못해서 가게 되는 인생의 1차 실패와 같은 의미였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가는 것을 고집하였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공부를 썩 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이 못하지도 않았다. 나는 공부한 것에 비해 성적을 내는 학생이었다. 머리가 비상하여 조금만 공부해도 시험을 잘 본다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건 과감히 버리고, 중요한 것에 집중하고, 시험을 출제한 사람의 심리를 잘 이해하는 편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점은 학창시절엔 도움이 되었지만 추후에는 큰 장애물이 되었다. 진득하게 노력하는 것을 처음 배울 수 있는 학창 시절에 요행으로 효율을 냈었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집 근처의 지방거점 국립대가 아니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이유는 역시나 돈이었다.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면 인서울도 가능하지 않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이런 사람들은 가난해본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나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전액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반드시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 그게 어긋나면 스탭이 꼬이게 된다. 장학금을 받더라도 생활비와 숙박비는 별개이다. 이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충당해야 한다. 생활비를 최소화하여도 숙박비와 최소화한 생활비를 합치면 아르바이트도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최근 임금인상이 급격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며 안된다. 과거 4000원 정도 되는 최저시급을 받으며 숙박에 생활비를 해결하려면 꽤 오랜시간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런데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모두 열심히 병행하면서 전액 장학금을 100%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실패하면 잃게 되는 것이 너무 크다. 한번만 삐끗해도 휴학을 해야한다. 그렇기에 전액장학금받고 알바하면 되지 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나는 가난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늘 그랬다.

 

나의 입시는 단 한 곳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성적은 이미 충분했다는 것이다. 집 근처 지방거점 국립대의 모든 학과를 이미 갈 수 있는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피땀 흘려 노력하는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은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길 바라셨다. 나의 부모님은 내 자식이 엄청나게 공부를 잘했지만 집안 문제 때문에 그 대학교를 갔다는 자존심을 세우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추잡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알아준단 말인가? 비참하지 않은가? 나는 그래서 적당히 성적 관리를 하며 친구들과 술, 담배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가난했음에도 술, 담배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에 내가 담배를 친구들에게 공급하고 500원씩을 받았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시간을 버렸다. 열심히 공부했다면 공부하는 습관을 들였을 것이고, 영어라도 했다면 훗날 많은 시간을 절약했을 것이다.

 

이후 나는 무난하게 지방거점 국립대 경영대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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